“여러분, 나 우는 거 본 적 없죠?” 딴청을 하던 아이들도 고개를 들어 연사의 눈을 바라봤다. “하루에 20건 정도 소년재판을 했던 날이 있었어요. 나는 아이들을 좋아하는데…. 부모님과 환경 때문에 잘못된 아이들에게 처분을 해야만 하는 상황이 너무 힘들었어요. 법정을 나가 화장실 벽을 부여잡고 많이 울었어요. 내가 학대를 당하는 것 같고 가정폭력을 당하는 것 같아서….”
청소년 보호 해결사로 나선 판사들
조군은 또래들을 폭행해 돈을 뺏는 일을 반복하다 재판에 넘겨졌다. 저지른 일은 소년원감이었지만 문 판사는 그를 임시로 4주간 소년분류심사원에 맡기고 지켜봤다. 심리 과정에서 문 판사는 그에게 깊이 새겨진 학대의 상흔을 발견했다. 조군은 “아버지가 술에 취하면 심하게 때리곤 했다”고 털어놨다. 문 판사는 그를 소년원에 가두는 대신 ‘세품아’에 맡기기로 했다.
“기도 끝에 아이들을 받기로 했다”는 명 대표는 이후 판사들과 함께 본드 근절 캠페인에 나섰고, ‘세품아’가 품은 아이들은 세상에 마음을 열어갔다. ‘세품아’ 3년차인 조군은 첫해 고졸 검정고시를 통과해 지난해 말부터 수능 준비에 매진하고 있다. 그는 처음엔 반항심과 분노 때문에 문 판사에게서 “눈으로 레이저를 쏘는 것 같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경영대를 졸업해 사업가가 되고 싶다”는 조군은 “어른들은 제 잇속만 챙기려 한다는 고정관념이 여기에 온 뒤 무너졌다”고 했다. 문 판사는 “과거 대가족 사회에서 부부싸움이나 가정폭력을 중재했던 ‘어른’ 역할을 법원이 상담과 조정을 통해 해내야 한다. 각 지역 공동체 내의 아동 보호 전문기관과 의료·상담 전문가 등이 협력해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고 말했다.
◆ ‘해결사 법원’의 실험과 논란 = 최근 각 지역의 가정법원과 지방법원 소년·가사 전담 재판부를 중심으로 법원이 ‘사건 처리’라는 고전적 역할을 뛰어넘어 사회문제의 종합적 해결사로 나서는 실험이 전개되고 있다. A양 사건에서 검찰 수사에 앞서 법원이 나선 것도 문제 해결 기능을 강화하려는 대법원의 의지가 실린 결과라고 한다. 2014년 피해아동보호명령제도가 도입된 뒤 A양처럼 이 제도를 통해 구제된 아이들은 이미 100명이 넘는다.
서울가정법원은 2014년 4월 학교폭력의 가해자로 법원에 구인돼 온 중학교 2학년 B군을 서울 신길동의 마자렐로센터에 맡겨 보호했다. 이 과정에서 B군이 어머니와 이혼한 뒤 아버지의 구타와 욕설을 못 이겨 가출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 법원은 같은 해 11월 아버지의 접근을 금지하고 친권을 정지시킨 뒤 아이를 어머니에게 돌려보냈다. “엄마와 살고 싶다”는 아이의 바람에 귀 기울인 결과다. 서울가정법원은 최근 건강가족기본법 개정을 추진하고 있다. 혼인 시 여성가족부로부터 결혼생활과 부모 역할에 대해 교육을 받도록 의무화하는 내용이다. 신순영(37·35기) 판사와 새누리당 신의진 의원이 공동 작업한 결과물이다. 신 판사는 “가정폭력과 아동학대의 근원에는 준비되지 않은 결혼이 있다. 혼인 단계부터 배우자·자녀와 의사소통하는 방법을 배울 수 있게 하려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서울고법 김상준(55·15기) 부장판사가 주도해 온 ‘치료 사법(司法)’도 문제 해결 법원 실험과 유사한 측면이 있다. 김 부장판사는 가벼운 정신질환을 앓고 있는 범죄자들에게 치료를 전제로 한 보석을 허가해 상담과 치료의 기회를 주고 있다. 그 과정을 충실히 이행한 이들에게는 집행유예를 선고해 사회로 돌려보낸다. “죗값을 치르는 것도 필요하지만 죄를 짓게 한 병을 치료하는 게 근원적 처방”이라는 소신에서 시작한 일이다.
이들의 실험을 뒷받침하는 제도도 조금씩 갖춰지고 있다. 대법원은 3월부터 순차적으로 소년보호·가정보호·아동보호 사건에 대한 집행감독제도를 시행한다. 위탁보호나 상담·치료 등을 처분한 뒤 그 이행 경과를 법원이 주기적으로 확인해 가며 사회 복귀 및 가정의 회복을 단계적으로 도모하려는 것이다. 김 부장판사의 실험은 12월부터 시행되는 치료명령제로 결실을 봤다. 형사사건 처리 과정에서 알코올중독이나 정신질환을 앓고 있는 피고인들에게 판사가 치료를 명령할 수 있도록 치료감호법이 개정됐다.
하지만 기존 법원의 울타리를 뛰어넘으려는 시도에 대한 우려도 곳곳에서 제기된다. 이화여대 노충래(사회복지학) 교수는 “법원이 직권으로 피해아동보호명령을 내리는 건 앞뒤가 뒤바뀐 것”이라며 “수사기관의 사실 확인과 전문가의 상담이 법원의 개입보다 우선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서울 소재 법원의 한 판사는 “법원이 책임지고 사후감독을 하려면 전문조사관을 대폭 늘리고 관련 예산도 충분히 확보돼야 한다. 현재의 여건에선 판사들이 제도를 적극 활용할지 미지수”라고 말했다.
이유정, 정혁준 기자 uuu@joongang.co.kr
중앙일보 2016.01.09
[출처] http://news.joins.com/article/19383749